1976. 6. 11 지곡면 덕암농번기 탁아소는 모내기때와 벼수확시에 아이들을 둔 부모님들이 농사일을 할수 있도록 마을 아이를 돌보는 것으로 농촌지도소(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했다. 사진은 지곡면 덕암마을로 교육 받은 보모가 아이들에게 노래나 율동을 가르치는 모습이다. 이 아이들이 현재 50세 전후로 ..
<1982. 7. 3 함양군청 홍보판> 남북대치가 치열했던 냉전시절 반공대회나 사진전, 웅변대회같은 것이 종종 열렸었다. 특히 함양은 6.25전쟁이 끝난 1953년 이후에도 지리산을 중심으로 공비토벌작전이 벌어 벌어졌던 곳으로 근대사에 이데올로기로 피해를 입은 지역이다. 사진은 군청앞에 있는 군정홍보..
<1982년 휴천면 산두> 꼭, 30여년 전의 모습이다. 비료가 귀했던 시절 땅심을 돋우기 위해서는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어야 했다. 모내기를 끝내고 풀이 많이 자란 7~8월 퇴비를 만들기 위한 풀베기를 했는데 행정에서는 이를 독려하기 위해 퇴비증산 대회를 열기도 했다. 마을주민이 공동으로 풀베기를..
<1981년 6월 함양군>품앗이 모내기하는 모습으로 사진 수집 시 장소를 기록하지 못해 아쉬움이 있다. 조금마한 다랭이논 이지만 이웃 주민들이 힘을 모아 모내기를 돌아가며 해주는 품앗이는 우리의 오랜 풍습이였다. 지금의 벼농사는 98%가 기계화 되었지만 20여년 전만해도 손으로 모내기하고 낫으로 ..
<1971년 함양군 함양읍>우리 군에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만들어 지기 전에는 버드나무가 가로수인 이런 도로였다. 이런 도로를 우리는 신작로(새로운 도로 라는 뜻)라고 불렀다. 연세 많은 분들께서는 뽀얀 먼지를 내며 달린 버스가 그리운 길이지만 지금은 추억어린 버드나무길이 없어 아쉽다. 버드나무..
1974. 6. 19 함양읍 본백 모판에서 모를 찌는 모습이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나 벼 이앙기가 보급되기 전이 20년 전에는 이렇게 벼농사를 지였기 때문에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아침일찍 모를찌어 그날 모내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허리한번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작업이었다. 사진의 오른..
<함양군 수동면 1981, 6> 모내기 할 물이 없다. 냇물에 고여 있는 한방울의 물을 퍼기 위해 양수기가 3대나 설치되어 있다. 함양군 농업기상 통계에 1981년 모내기철인 5월 하순에는 비가 2.3mm, 6월 상순에 11.3mm내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시리설이 부족한 당시에는 당연히 물 부족으로 모내기를 ..
함양군 병곡면 원산 1980년 옥계지구 농업용수 개발사업 기공식모습이다. 즉, 지금의 원산댐 기공식 모습이다. 이 댐이 건설됨으로서 병곡면과 함양읍, 지곡면, 백전면 일부는 물 걱정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댐은 2013년 확장공사로 그 규모가 더 커져 인근 농지에 충분한 농업..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1991. 6 양파수확 일손돕기 모습으로 수동다리 인근의 양파논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 함양군에는 125ha의 양파를 재배해 6천톤의 양파를 생산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이는 올해 함양군 양파재배면적 800ha에 5만6000톤을 생산할 것에 비하면 적은 양이지만 당시에도 중요한 소득작목이..
함양읍 한들 1981. 5 권농일(勸農日)은 농업의 중요성을 알리고 식량 자급을 위해 1948년 제정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정부에서는 매년 5월 넷째주 화요일을 권농일로 정하여 모내기 행사를 실시해 왔는데 이는 이때가 모내기 적기로 농사를 권장하고 식량증산을 위함이었다. 사진은 함양..
함양군 마천면 1930년대 1930년대, 그러니까 80년 전의 마천장날 모습이다. 사진속의 아기 업은 아주머니는 검정고무신, 쭈그리고 앉아있는 분은 흰고무신을 신은 것 같다. 그리고 좌측에 앉아 있는 아주머니는 떡 상자에 떡을 파는 모습이고 단발머리 아가씨는 호박 같은 것을 그릇에 담아 파는 모습이다.&nb..
백전면사무소 준공식 1984. 12. 9 정면 현수막에 栢田面 廳舍 增築竣工(백전면 청사 증축준공)이라고 쓰여 있고, 좌·우에 <선진조국 발맞추어 복지고장 건설하자!, 화합하는 8만 군민 발전하는 지역??>으로 쓰여 있다.현수막의 구호를 보면 당시 시대상황을 읽을 수 있는데 1984년도 함양군민이 8만명..
함양읍 백천리 1970. 3. 30 소는 예나 지금이나 농가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특히 가축의 힘으로 밭갈이하고 달구지를 끌었던 1970년대의 한우는 농우라 하여 그 가치가 지금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소중했었다. 지금도 소 구제역이 발생해 차단방역과 예방접종을 하고 있었지만 그 때도 여러 가지 소 질병이 발..
<함양군 1982년> 1982년은 함양에 가뭄이 무척 심한해로 기록되어 있다. 특히 못자리를 설치해 묘를 키우는 5월의 강우량이 50.6mm였고, 모내기철인 6월은 59.6mm로 평년의 150mm전후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군정의 최우선 과제가 식량증산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 하는 것 ..
<함양군 1981년> 바지게로 흙을 운반해 객토하는 모습이다. 객토는 점토질이 높은 산 흙을 논에 넣어 산성화 된 토양을 개량해 벼농사가 잘되게 하는 작업으로 1970년대부터 1990년대 말까지 계속된 농정의 주요 시책이었다. 이 사진을 촬영한 1981년은 함양에 경운기가 1,200여대(마을당 4대) 보급되어..
“함양산천 물레방아 물을 안고 돌고, 우리집에 서방님은 나를 안고 돈다.”함양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노래다. 물레방아는 농경사회에 획기적 변화를 일으킨 기구였으나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고 전시용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물레방아는 조선중기 대표적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 선생께서 안의현감(1792..